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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떤 앤데요? 그렇게 잘 알아줄 거면 다른 것도 알아주든가.”

 

  파르라니 날이 서 있는 말이 떨어져 내린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리자 꽉 쥐어 희게 질린 주먹만이 시야에 담겼다. 그야말로 낭패, 라는, 생전 해 보지도 않았던 생각마저 떠올렸던 것도 같았다.

 

  나카아키 코우는 익숙한 듯 멍청한 표정을 하며 부드럽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저 멀리 흩어진 악보 두어 장이 에어컨의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팔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림이 둔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감이 마비된 기분이었다. 이어서 무어라도 말을 해 보려고 입을 연 청년은 끝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기름이라도 바른 양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세 치 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하게 굳어 아무런 변명조차 내뱉지 못했다. 입꼬리 끝에 간신히 걸린 미소도 평소와는 달리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말끔한 낯에 비치는 분노가 낯설었다. 전구 불빛이 벽면의 거울에 반사되어 어룽거리는 그림자를 그렸다. 그림자의 끝에 젖어 있던 쇼코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까맣게 침잠해 있던 표정이 날것 그대로 시야에 와 닿는다. 미미하게 구겨져 있는 단정한 미간과 보일 듯 말 듯 일그러져 있는 입매. 처음 보는 표정에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막막해진 코우는 쥐고 있던 주먹을 풀어 작게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누가 있었다면 방패삼아 회피라도 했을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매우 애석하게도, 대기실에는 오롯이 단 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대가 끝난 지도 한참 뒤였기에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래. 돌이켜 보면 세이텐 쇼코는 나카아키 코우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더더욱 어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만약 다른 이였다면 듣기 좋은 말을 속살대면서 기분이 나빴으면 미안하다고, 내 잘못이라고, 화 풀라고. 서슴없이 말들을 줄줄 뱉어내면서 끝끝내 대화를 재개하였을 코우였지만 적어도 지금의 상대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말을 내뱉더라도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의도를 금방 알아차릴 이였으니까.

 

딱히, 너를 파악한다든가... 억지로 정의한다든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리 들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요? 쇼코 씨가 그런 걸 물었어요?”

 

  간신히 끄집어낸 한 마디조차 쨍하니 되돌리는 것을 보면 말 다 했지. 안절부절 못하던 코우는 상대의 쪽으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보다가는 다시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의도가 나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는 등, 그저 내 능력에 대한 판단이고 네게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는 등. 머릿속에 떠올릴 때만 해도 제법 그럴듯해 보이던 사과들은 입을 통해 누덕누덕 기워지면서 새까만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달리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더듬더듬 내뱉던 코우에게로 싸늘한 대응이 떨어져 내린 건, 당연하게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말할 거면 그냥 아예 아는 척 하지 마세요, 나카아키 군! 몰라줄 거면 다 모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언제부턴가 낯설어진 호칭이 발랄한 척 하는 목소리를 타고 싸늘하게 꽂힌다. 저도 모르게 파르륵 떤 코우는 황망한 표정으로 푸른 눈을 들어 상대를 응시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냐. 머릿속에서 사이렌 소리가 왱알왱알 울렸다.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잖아? 내 재능은 그리 투자받을 만한 재능이 아냐. 남한테 피해를 주는 일이 옳아? 그것도 그 쇼코에게? 쇼코 날개를 꺾기라도 하려고? 설마 나는 쇼코의 추락을 보고 싶은 거야? 끌어내려놓고 빛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이라도 하게? 아냐, 그건 절대 아냐. 내가 어떻게 감히? 애초에 그럴 상대도 아니지만? 지금 그걸 생각할 때야?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하지 않아? 옳은 일을 한 거니까 쇼코도 나중에 이해해 주지 않을까? 언제 이해해? 같은 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은 상대인 걸 뻔히 알면서?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도 우습지 않아? 처음부터 일정 이상은 관여하지 말자고 선을 긋고 시작했는데.

 

아니, 애초에 이건 옳은 일인가? 매번 얘기가 나올 때마다 쇼코를 불쾌하게 하는, 이 사고가 정말 옳은행동이야?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쇼코를 따라잡기 힘든 건 사실이잖아, 내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게 쇼코에게 부담이 된다면 차라리 입을 닥치고 물밑으로라도 준비해야

 

  범람하는 의식 새로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를 꽉 채운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라 파들거리는 입매를 간신히 수습한 코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뻔히 보이는데 모른 척을 할 수는 없잖아.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널 전혀 불쾌하게 할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건 다 빼먹고 모를 거면 차라리 다 모른 척을 하세요. 희망고문인가요? 재밌네요!”

“..쇼코.”

그래요, 이 세이텐 쇼코, 여기 있답니다! 입이 뚫려 있으면 말이라도 제대로 해 보세요!”

 

 

  날선 눈빛이 똑바로 마주쳐 오자 차라리 서류 수천 장을 해결하라고 떠맡는 일이 훨씬 나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쇼코의 말대로 뚫린 입으로도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뱉지 못한 코우는 그저 정신이 아득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얼핏 못마땅한 시선이 쥐어뜯긴 팔에 닿는 것을 보았음에도 아닌 척 멀쩡한 체를 할 정신조차 없었다.

 

  그저 지극히 피곤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둡게 느껴졌던 조명이 각막이라도 찢을 듯 사납게 빛을 쏘아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래? 나는 네게,”

 

  폐가 되지 않았어? ..않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 목을 졸리기라도 한 양 간신히 내뱉은 말은 초라하였고, 역겨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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